호국보훈의 달 특집

#고맙습니다 #기억합니다
나라를 위한
헌신을 기립니다

6월은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이들의 정신을 기리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억하기 위한 ‘호국보훈의 달’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성장하기까지 목숨 바쳐 국가를 지킨 많은 분을 기억하는 것, 후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게 존경심을 갖고 감사함을 전해보자.
호국보훈의 달 6월을 살아가며
경축일 및 평일
조의(弔意)를 표하는 날
호국보훈이란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호국(護國)’과 공훈에 보답한다는 ‘보훈(報勳)’이 합쳐진 말이다. 즉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분들의 뜻을 기리고 국가와 국민이 보답한다는 의미다. 국가보훈처는 6ㆍ6 현충일, 6ㆍ10 만세운동, 6ㆍ25 전쟁, 6ㆍ29 제2연평해전이 있는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했다.
먼저 6ㆍ6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56년 지정된 법정기념일이다. 당일 오전 10시 정각에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진다. 국가유공자를 추모하고 그들의 헌신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1분간 묵념하는 시간이다. 현충일에는 태극기를 조기(弔旗) 게양하는데, 깃봉에서 깃 면의 세로길이 만큼 내려달며 조기는 현충일 당일에만 게양한다.
6ㆍ10 만세운동은 학생 중심의 민족독립운동이다. 일제강점기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에 새로운 불씨를 지핀 계기로 꼽히며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 결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6ㆍ10 만세운동은 3ㆍ1 운동, 11ㆍ3 학생독립운동과 함께 국내 3대 항일운동으로 꼽힌다. 6ㆍ10 만세운동은 2020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또 하나의 가슴 아픈 역사 6ㆍ25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기습적으로 남침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6ㆍ25 전쟁은 무려 3년간 지속되었고 이로 인해 남한의 사상자만 132만 명, 1천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또한 전세계 21국에서 총 195만 명의 유엔군이 참전했고, 그중 약 4만 명이 전사하고 10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야 휴전 협정이 체결되며 분단이라는 결말을 맞이했다.
국민들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때 발생한 사건도 있다. 2002년 한ㆍ일 월드컵 폐막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29일 발생한 6ㆍ29 제2연평해전이다.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만에 일어난 해전으로, 당시 우리 해군에서는 총 6명이 전사했으며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제2연평해전으로 인해 앞날이 창창했던 청춘들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6ㆍ25 전쟁으로 3년만에 만나는 모자
1953년 6ㆍ25 전쟁 병사 사진
미양 방면의 피난민 모습
6ㆍ25 전쟁 당시, 안성에서는
북으로, 남으로 밀고 밀어내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던 시기, 안성은 어땠을까. 6ㆍ25 전쟁의 과정에서 안성시에서 사망, 학살, 납치, 강제징용, 행방불명, 부상 등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공식적으로 882명이며, 집계되지 않은 비공식 피해자까지 더하면 규모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측된다. 뿐만 아니라 안성 지역의 주요 건물도 파괴되었다. 읍·면 청사 12곳이 전파 혹은 부분 파괴되었고 학교 건물도 일부 파괴되었다. 일죽면 주천역(안성선) 옆 양곡 창고와 원곡면 칠곡리 용소마을은 불에 타서 없어지기도 했다. 역사가 오래된 안성제일교회의 예배당, 목사관도 폭격으로 형체를 잃었다.
안성시는 1965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안성공원에 현충탑을 세웠다. 이후 1975년 지금의 위치인 봉산동에 재건립됐다. 안성시 현충탑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안성 출신으로 전사하거나 희생된 육·해·공군 장병, 경찰관 등의 넋을 기리고 있다.
6ㆍ25 전쟁 참전용사를 만나다
DIMA(동아방송예술대학교) 방송보도제작과
박민영 님의 협조를 받아 게시되었습니다.
자료 출처 안성시지1 역사와 지리(2011), 행정안전부, 전쟁기념관 오픈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