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안성

600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안성향교,
그 역사를 좇아서

유학의 중심
향교(鄕校). 고려에서 비롯돼 조선시대까지 계승된 공립교육기관으로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시며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으로 오늘날의 국공립 중·고등학교에 준한다. 향교는 크게 문묘와 학교 두 공간으로 구분되는데 문묘에는 성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학교에는 교육을 받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다. 유학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향교에 모두 입학할 수 있었으나 어느 정도 수준의 읽기와 쓰기가 가능해야 했다. 향교 교생들에게는 몇 가지 특혜도 주어졌다. 양반 신분을 보증해주고, 군역의 의무가 면제되기도 했다. 향교는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문화와 교육을 아우르며 그 기능을 강화했으나 조선 말기,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학제를 개편하며 교육기관으로서의 향교의 역할은 줄어들고 주로 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안성향교 유림들
안성향교 분향례
안성의 자랑스러운 역사 문화유산
역사가 깊은 문화유산이 많은 지역인 경기도 안성에도 세 곳의 향교가 있다. 죽산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6호), 안성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7호), 양성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8호)는 세월의 무게만큼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중 안성향교는 보물 제2091호 대성전과 보물 제2092호 풍화루를 품고 있다.
안성향교 대성전은 전학후묘(前學後墓)의 형태에 따라 가장 안쪽,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 5칸 규모의 대성전은 조선시대 군·현 단위 향교로서는 큰 규모에 속한다. 대들보, 중보, 종보를 갖춘 삼중량의 지붕은 17세기 전반 주로 남부 지방에 사용됐는데, 특이하게도 중부지방인 안성향교에도 동일한 양식을 사용하고 있어 가치 있는 학술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안성향교 풍화루는 정면 11칸, 측면 1칸 규모로 현존하는 향교 풍화루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조선 후기 번화했던 안성의 사회적·경제적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목재 공급이 어려운 난전 속에서도 효율적으로 목재를 사용하여 구조적 안정성과 우수한 조형미를 갖췄다.
안성향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 일년에 24번의 분향례(焚香禮)와 공자 탄신일(음력 8월 27일)에 대제를 지낸다. 내리쬐는 뙤약볕에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도 곧은 정신과 마음가짐으로 정성을 다해 봉행한다.
대성전
풍화루
정용문 안성향교 전교
정용문 안성향교 전교는 “분향례도 일반인들이 와서 관람할 수 있는데 이런 제례들이 열리는 것을 잘 모른다. 현대 사회에서는 향교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고 밝혔다. 이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안성향교에서는 매주 전통 예절, 서예 교실, 한문 강습 등을 진행하고 있다”며 “향교의 문을 활짝 열어놨기 때문에 언제든 찾아와 쉽게 교감하였으면 좋겠다. 저희 유림(儒林)들이 함께 도와드릴테니, 향교에서 여는 교육에도 많은 관심과 참석 부탁드린다”라고 말했다.
정재균 교화장은 “안성향교를 포함해 전국 16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이 이뤄지고 있다. 세계유산 등재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향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지가 먼저다. 향교나 서원이 고례 등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부분을 담당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지자체에서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선행되어야 유림들도 힘을 얻어 향교의 가치가 지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성향교

  • 주소 안성시 향교길 90-4 (명륜동)
  • 문의 031-675-0027
안성향교
(기고문)
향교의 입지
안성향교는 안성의 진산인 비봉산 아래에 서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안성 읍치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1리 정도 되는 가까운 곳에 두어 제향과 교육 기능을 담당하였다. 비봉산 북쪽으로는 구포산이 종산이 되며 보산이 조산(祖山)이 된다. 동쪽의 내청룡은 백운산이 되고 외청룡은 칠장산이 된다. 서쪽의 내백호는 찾기 어렵지만 외백호는 건지산(지금의 고성산)이 되며 군 남쪽 2리에는 남산이 있어서 안산을 이루며 멀리는 서운산이 있어서 조산(朝山)을 이룬다. 내수는 용인 보개산의 국사봉에서 발원한 물이 서남으로 흘러 칠현산에서 발원한 하천과 만나 안성군 남쪽에서 동에서 서로 흐르는 외수를 만나 서해 바다로 빠진다. 이처럼 내외 사산이 모두 갖추어진 것은 아니지만 안성향교는 비교적 사산과 내외수가 잘 갖추어진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풍수적으로는 금계포란형국(金鷄抱卵形局)인데 비봉산이 암탉 형상이며 닭이 품고 있는 알 자리가 바로 향교이다. 이를 보호하기 위해 도기동에 탑을 세웠다고 하며 향교 앞에 안성천(조선시대에는 영봉천이나 남천으로 불림)이 있는 것은 안정과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향교의 창건
향교의 창건은 조선 중종 28년(1533)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앞선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에는 ‘향교가 군 동쪽 2리에 있고, 훈도 1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책이 간행된 1468년에는 이미 안성향교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또 『태종실록』에는 태종 1년(1401)에 ‘윤조(尹慥)가 안성의 학장’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안성에 향교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보다 앞선 양촌 권근(權近)의 『양촌집(陽村集)』(1389년)에는 안성 관아의 동루였던 극적루를 수리하고 ‘향학(鄕學)의 장 정한(鄭翰)을 서울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1362년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어 관아의 극적루를 짓고 그 여세를 몰아 안성향교를 창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1750년대에 작성된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현 위치인 비봉산 아래 향교가 그려져 있고 ‘향교(鄕校)’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객사 서쪽에는 그림은 없지만 ‘구향교(舊鄕校)’라는 글씨가 쓰여 있으며 객사와 향교 사이에는 ‘아사(衙舍)’가 없고 ‘읍기(邑基)’라고만 쓰여있다. 이것은 군으로 승격되기 이전 관아 터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안성향교는 고려 말인 1389년 이전에 창건되어 『동국여지승람』이 쓰여진 조선 초(1468년)까지는 관아의 서쪽에 있다가 이후 관아 동쪽인 현재 위치로 이건 된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고려말에 창건된 안성향교는 조선 전기 잘 유지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한동안 복구되지 못하다가 현종 1년(1660)이 되어서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임란 직후에 나타나는 삼중량 가구 형식과 문얼굴 가운데 문설주가 있는 영쌍창 형식은 각각 안성향교 대성전과 풍화루에서 볼 수 있다.
안성향교의 가치
안성향교에서 가장 특징적인 건물이 풍화루이다. 동·서재와 연결되어 있으며 기숙하는 학생들의 답답함을 덜어주고 호연지기를 기르거나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시회나 향음주례와 기념행사를 열 때 사용하던 건물이다. ‘풍화(風化)’는 군자들이 예절을 익히고 음악을 배우고 익혀 향촌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유교적인 의미가 있어서 전국의 많은 향교에 같은 이름의 풍화루가 있다. 그러나 안성 풍화루는 보통 다른 향교들이 3×2칸의 문루 형식이라는 것과 달리 규모도 11×1칸으로 압도적으로 크고 중앙 한 칸에만 문이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는 문루의 성격보다는 유식(遊息) 공간으로서의 누각적 성격이 강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성향교는 위치와 배치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풍화루를 통해 다른 향교와 차별화된 예술적 특수성과 우수성을 발휘했다. 밖에서 풍화루 앞에 서면 장중함에 압도되지만 안에서 뒤를 돌아보면 지형 차이로 인해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또 하층 기둥은 굵고 거친 1자 3치의 원기둥이지만 상층기둥은 7치의 잘 가공된 각기둥으로 대비를 통한 조화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제향공간의 중심인 대성전은 1630년부터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중건 시기가 명확히 규명된, 흔치 않은 조선 중기 건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가구법은 보를 3층으로 건 삼중량(三重樑) 구조이며 7량가이다. 1고주5량으로 하거나 7량일 때는 2고주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1고주임에도 불구하고 7량으로 했다는 것은 보를 3층으로 걸고자 하는 의도이다. 이것은 건물의 위계와 상징성을 높이려는 것으로 의도된 가구법이다. 삼중량 가구 이외에도 공포가 앞은 출목이 있는 이익공이며 뒤는 무출목의 초익공형식이다. 전면은 겹처마이며 배면은 홑처마이고 앙곡과 안허리곡도 전면이 배면보다 두 배 정도 강하다. 포부재의 단청도 전면은 익공에 약간의 색긋기가 있지만 배면은 가칠로 단순하다. 일련의 이러한 차이는 전면을 장식하여 화려하게 보이려는 미학적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다. 보는 우람하지만 자연목 상태를 그대로 활용해 치목을 최소화함으로서 임란 후 재료 조달 및 경제적 어려움을 잘 풀어내면서도 미학적 의도는 고스란히 반영한 창의성이 매우 뛰어난 건물이다.
이처럼 안성향교는 창건과 중건과정을 거치면서 당시 사회경제적 상황을 잘 반영하였고 건축적 의도를 미학적으로 잘 풀어낸 모습이 건물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우수한 문화유산이다.
김왕직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교수)
| 공학박사 / 문화재보수기술자
| 명지대(학사·박사)
| 한양대(석사)
| 동경대(박사후과정)
| 한옥R&D센터